작가와의 대담 by K’ ARTS STUDIO
오제성
작가, 전시공간 황금향 운영자
작가, 전시공간 황금향 운영자
오제성(이하 오) : 이지안 작가님의 작업 속 풍경들이 갖는 가능성으로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작가님의 작업에서 보여지는 풍경들은 거대하고 장엄하며 큰 의미를 갖는 곳들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작가님의 글에서는 ‘그리 대단치 못한 풍경’, ‘일상적인 풍경’으로 서술하셨습니다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고 싶어요. 대단하지 못한 풍경은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의 세계에서 어쩌면 당연하게 연구되어온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주의로 대표되는 구스타프 쿠르베의 경우 낭만주의, 관전파의 관점에 대항하기 위해 <쿠르베씨 안녕하십니까>와 같은 일상적인 풍경을 직접적으로 화폭 안에 들여왔고, 목가적인 풍경을 그려온 인상파 화가들은 빛의 재현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물리적 이동거리가 짧은 근처의 이름없는 풍경들을 다뤄왔습니다. 사진의 영역에서는 가브리엘 오로즈코를 언급해보고 싶기도 합니다. 좀 더 정치적인 이유에서는 베른트 & 힐라 베허 부부가 유형학적 사진을 완성하기 위해 다양한 장소에 흩뿌려져 있는, 어쩌면 작업 소재로 아무도 큰 관심이 없었을 시설물들을 사진에 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작가님의 ‘아무 곳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풍경들은 어떤 관점에서 수집되어 오고 있는 것일까요? ‘원 풍경의 태도마저 전복시키고 싶은’ 그 풍경들은 과연 어떤 곳들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작가님의 작업을 미술사적 계보 내에 한 번 위치 시켜볼 수 있는 방편이라 생각합니다.
이지안 (이하 이) : 말씀하신 것처럼 물리적 이동거리가 짧은 인상파 화가들의 관점도 작용하는 것 같아요. 더 처음으로 돌아가보면 대학원 시절에는 주로 실내에서 사물들을 촬영했어요. 미대를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그려왔던 그림이 정물화였는데, 그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사진을 많이 찍다보니까 피사체들이 차츰 연출된 구도의 정물에서 실내 곳곳에 놓인 의도치 않은 구도의 일상사물들로, 외부의 쓰레기더미나 낡고 닳은 구조물들로 바뀌어갔죠. 보통 예쁜 구도로 반듯하게 놓인 사물들은 도시의 전면에 있지만, 신경을 안 써서 아슬아슬해 보이는 구도로 쌓여있는 사물들은 보통 거리의 후미진 곳에서 많이 발견되곤 하잖아요. 그런 정물이 있는 곳만 찾아가 사진을 찍다보니 자연스럽게 장면을 이루는 장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던 것 같아요. 어떤 장면을 기록했다는 것은 그 순간 내가 보고 있는 것을 계속 보고 싶다는 심리가 분명 있다는 것인데, 보편적 미의식으로는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는 곳이니까. 그곳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이나 태도와 타인들의 태도 사이의 간극을 좁혀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오 : 이번에는 작가님이 이미 다뤄온 장소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넘어가보고 싶습니다. 특히나 영등포 시장, 기계상가,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강남아파트에서의 작업들을 살펴보면 ‘살짝은 비켜나는 장소 특정성’을 발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울 제조업의 상징이자 허파와 같은 을지로와 청계천이 아닌 영등포 일대, 정치적으로 첨예한 대립을 이루었던 용산, 구룡마을 등이 아닌, 조금은 한국 재개발사에서 마이너한 위치에 있는 조원동 강남아파트를 다루어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장소들이 갖는 특성들이 작가님께서 말씀하신 ‘대단하지 않은 풍경’들과 연관 있을까요? 혹은 개인사적인 연계점으로 위의 풍경들을 다뤄오신 것인지요?
이 : 사전 조사와 답사, 날씨와 외부 환경까지 고려한 출사계획을 단단히 꾸려서 촬영을 나가시는 사진 작가님들이 보시기엔 조금 나이브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는 면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작업계획을 세워놓고 출사를 나간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다만 내가 수집한 장면들을 살펴보니 대부분 어떤 특성의 풍경이어서, 이후 선택과정에서 좀 더 결을 정리해 나간 건 있죠. 일상성, 대단하지 않음, 장소특정성 같은 특성들은 촬영 전에 상정된 것이 아니라, 촬영 후에 찾아낸 공통적 특성이기 때문에 그것이 계획한 장면에서 보이는 일관성을 살짝씩 비켜나가는 느낌으로 보일 수 있을 것같네요.
오 : 작업에서 시간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고자 합니다. 작업적 이동경로들을 보면 매우 선형으로 진행되고 있는 인상입니다. 앞서 주신 포트폴리오에서, 서울-부산-노르웨이-서울의 지점들이 시간대 순으로 점차적으로 이동합니다. 즉 서울에서는 서울의 이야기에, 부산에서는 부산의 이야기에, 노르웨이에서는 노르웨이의 이야기에 충실해 보입니다. 각 장소들마다 비선형의 시간으로 연결되는 부분들이 있는데 제가 미처 살펴보지 못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 : 저의 경우, 스냅샷을 작업의 재료로 사용하는 만큼, 작업을 염두에 두고 일주일만 카메라를 들고 다녀도 수집된 이미지의 양이 상당해져요. 쌓인 이미지를 선별하고 편집해 내보내는 과정도, 어느 정도 사진의 생산속도에 맞추지 않으면 나중에는 그 무게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지더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작업이 일면 순차적으로 진행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올해부터는 조금 결이 달라지는 부분도 생겨나고 있어요. 장소에 얽매인 상상을 좀 벗어나서, 여러 곳에서 모아 온 개별 이미지들로부터 촉발되는 각각의 사유나 상상력에 더 초점을 맞춰서 작업을 시도하고 있어요.
오 : 순차적 흐름에서 벗어난 최초의 사례라니, 꼭 한번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전에 앞서 시간순서에 맞춰 진행해오신 기존 작업들에 대해 잠시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아요. 작가님의 포트폴리오를 앞으로 뒤로, 시간 역순, 시간순으로 넘겨보며 저는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밖의 풍경을 보고 있는 듯한 일종의 속도감을 느꼈습니다. 물론 작가님의 작업들이 창문 밖의 풍경들을 빠르게 포착한 방식은 아니지만 전시장, 포트폴리오에서는 그 여정이 생략된 채 선형적 결과의 나열들만으로 비춰질 수 있어 이야기를 좀 더 풀어보고자 합니다. 폴 비릴리오는 그의 저서 <속도와 정치>에서 질주학적 진보에 의해 이분화가 강요된 영혼을 언급합니다. 하나는 환경에 의존하기 때문에 약하고 우유부단하며 상처입기 쉬운 영혼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을 탈영토화 할 수 있고, 자신의 경계와 시점을 정교화할 수 있어서 자신의 의지를 쉽사리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둘 수 있는 강한 영혼으로요. 저는 이 두 영혼 사이의 미묘한 차이들이 작가님 작업 곳곳에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Just After Christmas> 연작 중 평면 작업의 경우 배경의 풍경은 여행지에서 빠르게 스쳐지나갔던 풍경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터전(영토)의 의미가 희석되며 유목적인 상황들, 이방인의 태도가 읽힙니다. 그리고 이후 스튜디오에서 정물들과 함께 재촬영한 장면들에서는 정착, 안정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여행이나 이동 후의 후일담들을 추억삼아 이야기하는 듯 하기도 하구요. 이동과 정착이라는 강한 두 열망이 충돌하는 부분입니다. 비릴리오를 재차 언급하자면, 그는 현대 사회가 가속화와 공간의 축소화로 인해 ‘극의 관성’에 도달한 상태라 표현합니다. ‘극의 관성’은 속도가 극한에 다다른 임계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임계점은 떠나기도 전에 도착해 있는 상황, 이동하는 과정이 의미를 잃어버린 상황으로 저는 해석하고는 합니다. 따라서 저는 작가님의 작업을 임계점 직전의 과도기적 상태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혹은 시대적으로 이 세계가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지만 다시 과도기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의 작업에서 물리적 이동, 관념적 이동들이 미치는 영향들에 대해 자세히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 : 제 안에는 유목과 정착에 대한 상반된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아요. 그것이 말씀하신 이분화된 영혼과 닿는 지점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어떤 사회에 완전히 정착한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조금은 거리를 두고 지내는 이방인만이 느끼는 생경한 정서를 좋아하고 그럴 때 나에 대한 생각이나 작업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긴 해요. 근데, 생각해보면 결정적으로 또 다른 곳으로의 이동을 결심했던 순간은 더 나은 곳에서의 정착을 꿈꾸고 있을 때거든요. 어떤 곳을 떠나는 이유가 이젠 그 곳이 지겹거나 자유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그 곳이 나의 최종 정착지일 수 없음이 인지될 때, 그 곳에서의 내 경험과 시간을 통해 다음 목적지로 진입할 근거를 나름대로 충분히 마련했기 때문이라고 해야할까요. 달리 말하면 어떤 곳에 대한 인식의 파편들을 재료삼아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한 형태가 작업이라면, 이미 작업이 나온 이후에는 그 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어지는거죠. 이제 나는 그곳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더 내게 맞을 것 같은 곳으로 진입할 힘을 얻게 되는 거라고 할까요.
오 : 매번 새로운 상황에 대한 태세 전환과 대응이 매우 중요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질 들뢰즈의 유목적 사고와 백남준의 유목적 상상력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들뢰즈는 ‘제자리에서의 여행’이라는 재미난 개념을 가져옵니다. 하지만 기다리는 방법, 무한한 인내력을 통한 제자리 여행이라는 점에서 의도한 지점으로의 이동을 의미한 비릴리오의 ‘임계점’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의도된 사유가 아닌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맞이하거나 받아들여야 하는 사유 체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예측불허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며 의도보다는 우연에 대한 임기응변이 중요할 때도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작가님의 야외촬영과정에서 어떠한 기다림이 있는지, 어떠한 저항이 있는지 알 수 있다면 작업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 야외 촬영과정에서 기다림이나 저항이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발견된 풍경과 저의 즉각적인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것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면 그 파편을 작업을 위해 애써 수집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음 번에 맞게 될 더 좋은 순간과 파편들이 늘 그랬듯이 있을 것이고, 개별 파편들이 전체 그림을 완성하는 데 꼭 필요한 퍼즐 조각의 형태로서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오 : 백남준의 어록을 모아둔 <백남준 :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를 보면 백남준의 유목적 사고체계와 상상력을 깊이 실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달리는 말 위에서 한 점의 풍경들을 바라보고 사유하고 이내 다른 풍경을 맞이하며 또 사유하고 상상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반복하는 인상입니다. 유목적 상상력은 중심 구획 없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때론 쉽게 휘발되는 것들이라는 인상입니다. 저는 작가님의 작업 과정에서 이러한 상상력들이 오브제와 설치를 이용한 후반 촬영에서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비직선적인 피드백 시스템이며 이를 탈중심화라는 단어로도 요약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업대 위에 올려진 풍경사진은 과거의 흐름은 닫히고 새로운 구조물들과 오브제들과 결합하여 새로운 풍경, 현재의 흐름을, 다시 한 번 사진의 셔터를 누르며 미래의 2차원적 풍경, 흐름을 예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단순한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현장에서 사진기를 들고 맞이하였던 인상들, 상상력들이 스튜디오에서 다시 각색될 때 어떤 모습으로 변주되어 가는지 그 미세한 부분들이 궁금합니다.
이 : 백남준의 사고 체계는 첫번째 촬영 과정에 닿아있는 느낌이에요.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면 앞서 언급하신 질 들뢰즈의 제자리 여행 개념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고요. 사유를 촉발하는 미약하고 개별적인 단서로서 파편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그것들을 살펴보는 과정을 거치게 되죠. 그러면서 파편들을 스튜디오의 작업대에 올릴 것인지, 말 것인지, 스튜디오의 작업대에 올리기로 한다면 어떤 것이 오를 수 있고 어떤 것은 그럴 수 없는 것인지를 생각하고요. 이후 선별된 이미지들의 결을 묶어주는 작업을 스튜디오에서 진행해요. 물론 이미지 하나하나가 스튜디오에서 개별성을 더 강화하기는 하지만, 그럼으로 인해서 전체적인 방향성을 띠게 되는 거죠.
오 : 스튜디오에서의 촬영이 선형의 이야기를 점과 점으로 압축 연결하는 주름의 개념으로도 바라볼 수 있을까요?
이 : 스튜디오 촬영 이전의 파편들이 선형의 구조로 이어져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만 개별적이고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점들을 또다른 점인 사물이나 확장된 사물과 관계 맺게 한다는 점에서 주름의 개념이 적용된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 : 사진 위에 올려두는 사물들은 사진과 어떤 연계점을 가지고 있는지 꼭 여쭤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그 사물들이 최종 결과물에서 감각적인 형태로 작용하는 것인지 혹은 개념적인 서사로 작용하는지도요.
이 : <일상과 환상>, <따뜻하고 푸른 물결> 시리즈에서 사물들은 이미지와 형태적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들로 선별, 촬영되었습니다. 특히 그 사물이 먼저 촬영된 사물들의 실제 크기와 대조적으로 작용하여, 평면인 사진 위에 올라간 것임이 도드라지는 연출을 시도하려고 했죠. 구체적으로 들어가자면 <일상과 환상> 시리즈에서는 익명성, 보편성을 띠는 사물들을 사용한 반면에, <따뜻하고 푸른 물결>시리즈에서는 좀 더 장소특정적인 사물이 쓰였죠. 촬영된 사진에 대한 저의 인식과 특성에 따라서 사물 역시 그런 특성을 따랐던 것 같아요. 근데 <Just after Christmas>시리즈에서는 좀 더 사물의 연출적 성격이 가미됐어요. 여전히 사진과 관계 맺을 핵심 사물을 결정하는 기준은 사진과 사물의 형태적 연관성, 안팎의 경계 흐림이긴 하지만, 놓여지는 사물에 ‘파티가 끝난 뒤의 정적인 정서’라는 성격을 부여한거죠. 또 이전 작업보다 선형성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런 부분들이 강화되면서 시간의 흐름도 사물에 반영되기도 했고요. 그래서 이전에는 핵심사물 한 두개만 사진 속 이미지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면 <Just after Christmas>에서는 분위기 연출을 위한 다른 사물들이 등장함으로써 해석이나 관점의 폭도 좀 더 다양해지기를 의도했어요.
오 : 작가님 사진의 경우 시작점인 사진 위에 오브제 연출 이후, 총 두 가지의 특이점들에 도달한 모습들이 보입니다. 첫 번째는 사진이 다시 입체, 설치의 형태로 인화물이 다시 오브제로 해석되는 부분입니다. 아마 일상과 환상 시리즈에서 강남아파트 때부터 시작된 방법론이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 특이점은 <Just after Christmas>연작에서 January 02와 February 같은 작업들에서 발견됩니다. 인화물들이 사진 속에서 다시 정물처럼 작용하고 있습니다. 기존 작업에서 사진 인화물들이 오브제의 배경지 역할을 담당하며 평면적인 시선으로 그 경계가 매우 불분명해 보였던 작업들과는 매우 다른 어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시도와 변주의 이유들이 궁금합니다.
이 : 맞아요. <Just after Christmas> 시리즈에서는 이전과 다르게 사진이 더 직접적인 사물로 화면 안에 등장해요. 그것도 시간에 의해 마모되어가는 연약한 종이 몸을 가진 사물로서요. 그렇지만 이전부터 사용해왔던 사진 안쪽 이미지와 사진 바깥의 사물이 맺는 관계를 여전히 생각하면서 사진과 사물을 배치했기 때문에 사진 안과 밖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부분도 존재하고, 또 사진이 정물로 등장함으로써 그 경계가 확연해지는 부분도 동시에 가지고 있죠. 이 두 개가 완전히 다른 어법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진을 사물로 보는 저의 태도가 강화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아요.
오 : 매체를 실험한다는 점에서 즉물적이고 메타적인 해석이 다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풀어보자면 사진 자체가 갖는 기술적 특성에 대한 저항으로도, 혹은 어린아이가 사진을 평면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기술(포토샵과 같은)이 없어 그 위에 즉물적인 오브제를 붙여 나가며 사진을 조작하는 방식으로도 보입니다. 원본을 즉물적으로 복제한다는 점에서는 프로타주(탁본)의 의미도 가지고 있으면서 재생산된 이미지들을 설치작업에 대입한다는 점에서는 꼴라주의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이런 능력은 포착하고 현상하여 인화한다는 사진매체의 범주를 넘어서는 행위로 보입니다. 이러한 매체를 위한, 의한 실험들의 토대와 의도가 궁금합니다. 또 궁극적으로 그 의도들의 지향점이 있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이 : 저는 사진매체의 독특한 성격이 흥미로워 사진을 매체로 선택했는데요. 다른 예술매체와는 달리 빈틈없고 정확한 기계의 속성과, 그것을 다루는 불확실하며 주관적인 인간의 속성이 공존하는 사진의 매체적 특성이 늘 양가적인 태도 사이에서 고민하는, 혹은 상반된 입장의 경계선에 서 있는 것 같은 제 모습과 닮은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서 끌리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경계에 대한 특별한 인식 때문에 그걸 흐리거나 강화하는 두 가지 모습을 후반 작업을 통해 더 강조하는 것 같고요. 특히 기계가 가지는 재현의 정확성이나 객관성이 생각보다 우리의 눈을 가리는 측면이 많아서, 그 반대쪽 특성, 즉 인간의 주관에 의해 제어되는, 연약하고 쉽게 변질되는 속성들이 쉽게 간과될 수 있다는 점이 저는 늘 마음에 걸렸어요.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대단하지 않은 풍경과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할 것 같은데요. 사진 바깥쪽의 평면성과 안쪽의 입체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과 세상에서 맺는 관계들도 역시 표면 밑에 다양한 층들이 존재하고, 그 표면은 오히려 내부보다 취약한 것이어서 언제든지 찢기거나 변형될 수 있음을 매체실험이나 형식변주를 통해 암시하고 싶었어요. 이런 생각이 미적 사고로 환유되었을 때 제가 작업으로 가져올 수 있는 사진의 문제적 지점은 시공간을 포함한 차원이나 크기 가변성, 시각적 재현 능력과 여타 감각적 재현 능력 사이의 괴리라고 생각했어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변형된 콜라주의 방식ㅡ차원을 교차시키거나 크기를 대조하는 등의ㅡ을 작업의 방법론으로 들여오고 그 변주적 실험을 지속해온 거죠. 만약 시리즈별로 내세운 각각의 주제들만을 말하고자 했다면 어떤 면에선 포토샵을 사용하는 것이 보다 완벽하고 효과적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모든 시리즈를 통괄하는 대주제는 사실 이러한 사진성을 부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진과 사물의 실제 배치에서 오는 충돌들을 의도적으로 화면 안에 담아내려 했어요.
오 : 사진으로 귀결되는 다각도의 접근과 해석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접근에 작가님의 삶과 경험이 녹아 함께하고 있어 더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방금 저는 작가님 사진에 대해 메타적 해석을 통한 접근을 시도하였습니다만 혹시 제도비평적 관점에서 작가님 작업을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있을까요? 형식이나 마감에 있어 매끄러움, 깔끔함과 구분되는 작가님의 사진에 대한 태도는 어딘가 특별해 보입니다.
이 : 사진을 다루는 사람들은 보통 매끄러운 감각, 정수의 아름다움 같은 것들을 지향하는 측면이 강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사진(가)적 감수성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런 게 저랑 딱 들어맞지는 않는 것 같아요. 또 사진을 매체로 선택한 이유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사진의 속성이 와닿아서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이런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고 제가 감각적으로, 본능적으로 좀 더 좋아하는 것은 평면조형보다 입체조형에 가까운 것 같아요. 특히나 입체조형 중에서도 불순물이 많은 상태라던가, 매끄럽지 못하고 우둘투둘한 질감이나 상태들을 좋아하다보니까 단순한 현장촬영만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는 사진가의 미니멀한 말하기 방식만으로는 충분한 완결감 같은 것을 잘 못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후반작업으로 일부 해소하는 측면도 있어요.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그런 매끄러움, 정수의 아름다움 뒤에 있는 속성들은 일관적이게도 제가 들춰내고자 하는 사진 뒤쪽의 하얀 면, 도시의 폐허적 풍경 등과도 결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오 : 동시대 상황에서 이지안 작가님 작업들이 갖는 의미에 대해 다양한 생각들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매체적, 개인사적으로 다양한 의의들이 내포될 수 있는 가능성들이 보입니다. 초반에 속도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만, 이번에도 작가님이 느꼈을 ‘상대적 속도’에 대한 의견들을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타국과 고국 사이에서 변화되는 삶의 리듬감을 포착하였던 부분들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주와 이주 사이에 리듬감이 왜 변화되었는지, 더 나아가 작업에는 삶의 리듬감이 어떻게 내재되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저는 Just After Christmas 2채널 방식으로 상영하였던 영상에서 그 단초들을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마스 이전, 한국을 떠나기 전 느꼈을 중압감, 피로들과 북유럽에 도착한 후 직감한 당혹스러웠을 고요함, 정적들이 묘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 한국과 노르웨이 사이에서 느낀 너무 다른 삶의 속도 ㅡ그것이 사람에 의한 것이든 환경에 의한 것이든ㅡ를 사진화된 사물과 계절마다 변하는 화면 연출을 통해 계획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평면 작업이었다면 Just After Christmas 비디오에서는 확실히 좀 더 복합적이고 직설적인 감정의 나열이 복잡한 그대로 드러났던 것 같아요. 우리가 가진 기억이라는 게 아주 연속적이고 평평하게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 의해서 이상한 순서로 맞붙고, 사실과 상관없는 서사 구조로 귀결되어 버리곤 하잖아요. 특히 사진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면서 기억은 소유한 이미지를 위주로 돌아가게 되는 측면이 있는데, 그것이 만들어내는 서사라는 게 정말 비논리적이고 비선형적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그 기억이 만들어낸 서사가 일말의 진실보다 더 강력한 진실처럼 믿어지는 경우가 허다한 것 같아요. 영화를 구성하는 영상과 텍스트도 서로 다른 맞붙음으로 진행되면서 어느 쪽에서도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이 쪽에서도 그럴듯하게, 저 쪽에서도 그럴듯하게 이어지면서 결국에는 같은 장면, 다른 텍스트의 결말로 끝나는데요. 저에게는 재밌게도 두 결론이 비슷한 크기로 제가 느꼈던 고요와 적막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평평하고 선형적인 서사의 흐름보다 오히려 더 진실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오 : 제가 혹시 이 작업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까요? 작업의 궁극적 의도에 대해 좀 더 들어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이 : Just after Christmas 필름은 또 사진성에 대한 다른 시도도 들어간 작업이에요. 비디오나 디지털 사진은 전통사진의 연장선 위에 있기는 하지만, 그 원형인 비물질 데이터가 하나의 몸에 안착하는 형태로써 굳이 물질로 전환될 필요가 더 이상 없다는 점에서는 다른 지점이 생겨난 것 같아요. 크기와 형태의 변형이 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졌고, 또 빛으로 공간과 사물을 점유하다가 어느 새 흔적없이 사라져버릴 수 있게 되기도 했죠. 이 즈음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서 특히 비물질적으로 존재하지만 나의 인식과 현실을 점령하는 것들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었는데, 이런 비물질 오브제들간의 맞닿음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디지털 사진 매체가 시공간을 파편화해 비물질 조각으로 갖고 있듯이 생각이나 기억, 소리, 불분명한 몸짓들 같은 다른 비물질 오브제들도 그 맥락을 끊고 파편화해 재료로 사용한다면 그들 사이에 비물질적인 주름을 생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거죠.
오 : 제가 작가님 작업을 좀 향수어리게 바라봤던 것 같아요. 저는 작가님의 작업이 사회적 피로, 개인적 피로와도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을숙도에서는 바다 노동에 지친 고단한 흔적들이, 강남아파트에서는 누군가가 치열하게 생존을 했을 풍경들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영주, 문래, 영등포 일대의 구조물들 역시 익명의 생존을 위해 부단히 분투하였던 사물들이 주인공으로 비춰집니다. 어쩌면 작가님이 현장에서 마주하였을 이 누적된 피로들이 작가님의 후반 스튜디오 작업들을 통해 위로받고 있는 인상도 들고요. 어쩌면 북유럽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의 작가님이 느꼈을 빠른 리듬감은 한국이라는 사회적, 개인사적 피로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 : 어떤 부분에서는 피로라는 감정과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노르웨이에 가기 전, 한국의 속도가 그리 버겁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어요. 그냥 당연한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힘들었던 시기는 준비가 안 된 채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저한텐 너무 느렸던 노르웨이의 리듬감과 그 리듬감에 적응하자마자 다시 태도의 전환을 강요받는 것 같았던 한국적 리듬감의 격차를 인지할 수 있었던 2019년 전반의 시간들이었거든요. 단지 어떤 시간대가 너무 느렸거나 빨랐기 때문이 아니라, 저의 중심점을 그 어디엔가 맞추고 적응하려 노력했던 그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피로와 스트레스가 저를 짓눌렀던 것 같아요. 그 힘들었던 기간 동안 작업을 했으니, 그런 것들이 보이는 건 확실히 그런 면을 드러내고 있는 거겠죠.
오 : 첨언하자면, 현대사회는 미셸 푸코가 얘기한 형벌적 체계가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변해왔습니다. 성과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개인들은 결국 더 큰 성과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매질하며 달려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속도와 시간의 이기가 개입될 수 밖에 없습니다. 수 많은 성공신화들은 누가 스스로를 얼마나 더 빨리, 더 많이 착취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되고는 합니다. 남들보다 덜 자고, 덜 먹고, 더 많이 일하는 모습들은 이제 남일 같아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경쟁속도에 대한 대칭점에서 저는 현재의 브이로그로 대두되는 일상성이 강조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의 느린 기록들, 어쩌면 큰 의미가 없을 이야기들, 누군가에게 관심이 되지 않을 만한 부분들, 먹고 사는 것과는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내용들이 어느 순간 폭발하듯 터져 나오고 있는 인상입니다. 저는 그런 부분에서 작가님의 작업이 그 일상성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미 없는, 대단하지 않은 풍경들이 작업의 전면으로 나오고, 마치 시간 역순으로 복기하듯 스튜디오 촬영 이미지가 과거를 반추하며 나아갑니다. 그렇게 저는 작가님의 심심하지만 위안되는 풍경 속으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2020)
이지안 (이하 이) : 말씀하신 것처럼 물리적 이동거리가 짧은 인상파 화가들의 관점도 작용하는 것 같아요. 더 처음으로 돌아가보면 대학원 시절에는 주로 실내에서 사물들을 촬영했어요. 미대를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그려왔던 그림이 정물화였는데, 그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사진을 많이 찍다보니까 피사체들이 차츰 연출된 구도의 정물에서 실내 곳곳에 놓인 의도치 않은 구도의 일상사물들로, 외부의 쓰레기더미나 낡고 닳은 구조물들로 바뀌어갔죠. 보통 예쁜 구도로 반듯하게 놓인 사물들은 도시의 전면에 있지만, 신경을 안 써서 아슬아슬해 보이는 구도로 쌓여있는 사물들은 보통 거리의 후미진 곳에서 많이 발견되곤 하잖아요. 그런 정물이 있는 곳만 찾아가 사진을 찍다보니 자연스럽게 장면을 이루는 장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던 것 같아요. 어떤 장면을 기록했다는 것은 그 순간 내가 보고 있는 것을 계속 보고 싶다는 심리가 분명 있다는 것인데, 보편적 미의식으로는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는 곳이니까. 그곳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이나 태도와 타인들의 태도 사이의 간극을 좁혀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오 : 이번에는 작가님이 이미 다뤄온 장소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넘어가보고 싶습니다. 특히나 영등포 시장, 기계상가,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강남아파트에서의 작업들을 살펴보면 ‘살짝은 비켜나는 장소 특정성’을 발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울 제조업의 상징이자 허파와 같은 을지로와 청계천이 아닌 영등포 일대, 정치적으로 첨예한 대립을 이루었던 용산, 구룡마을 등이 아닌, 조금은 한국 재개발사에서 마이너한 위치에 있는 조원동 강남아파트를 다루어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장소들이 갖는 특성들이 작가님께서 말씀하신 ‘대단하지 않은 풍경’들과 연관 있을까요? 혹은 개인사적인 연계점으로 위의 풍경들을 다뤄오신 것인지요?
이 : 사전 조사와 답사, 날씨와 외부 환경까지 고려한 출사계획을 단단히 꾸려서 촬영을 나가시는 사진 작가님들이 보시기엔 조금 나이브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는 면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작업계획을 세워놓고 출사를 나간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다만 내가 수집한 장면들을 살펴보니 대부분 어떤 특성의 풍경이어서, 이후 선택과정에서 좀 더 결을 정리해 나간 건 있죠. 일상성, 대단하지 않음, 장소특정성 같은 특성들은 촬영 전에 상정된 것이 아니라, 촬영 후에 찾아낸 공통적 특성이기 때문에 그것이 계획한 장면에서 보이는 일관성을 살짝씩 비켜나가는 느낌으로 보일 수 있을 것같네요.
오 : 작업에서 시간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고자 합니다. 작업적 이동경로들을 보면 매우 선형으로 진행되고 있는 인상입니다. 앞서 주신 포트폴리오에서, 서울-부산-노르웨이-서울의 지점들이 시간대 순으로 점차적으로 이동합니다. 즉 서울에서는 서울의 이야기에, 부산에서는 부산의 이야기에, 노르웨이에서는 노르웨이의 이야기에 충실해 보입니다. 각 장소들마다 비선형의 시간으로 연결되는 부분들이 있는데 제가 미처 살펴보지 못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 : 저의 경우, 스냅샷을 작업의 재료로 사용하는 만큼, 작업을 염두에 두고 일주일만 카메라를 들고 다녀도 수집된 이미지의 양이 상당해져요. 쌓인 이미지를 선별하고 편집해 내보내는 과정도, 어느 정도 사진의 생산속도에 맞추지 않으면 나중에는 그 무게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지더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작업이 일면 순차적으로 진행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올해부터는 조금 결이 달라지는 부분도 생겨나고 있어요. 장소에 얽매인 상상을 좀 벗어나서, 여러 곳에서 모아 온 개별 이미지들로부터 촉발되는 각각의 사유나 상상력에 더 초점을 맞춰서 작업을 시도하고 있어요.
오 : 순차적 흐름에서 벗어난 최초의 사례라니, 꼭 한번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전에 앞서 시간순서에 맞춰 진행해오신 기존 작업들에 대해 잠시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아요. 작가님의 포트폴리오를 앞으로 뒤로, 시간 역순, 시간순으로 넘겨보며 저는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밖의 풍경을 보고 있는 듯한 일종의 속도감을 느꼈습니다. 물론 작가님의 작업들이 창문 밖의 풍경들을 빠르게 포착한 방식은 아니지만 전시장, 포트폴리오에서는 그 여정이 생략된 채 선형적 결과의 나열들만으로 비춰질 수 있어 이야기를 좀 더 풀어보고자 합니다. 폴 비릴리오는 그의 저서 <속도와 정치>에서 질주학적 진보에 의해 이분화가 강요된 영혼을 언급합니다. 하나는 환경에 의존하기 때문에 약하고 우유부단하며 상처입기 쉬운 영혼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을 탈영토화 할 수 있고, 자신의 경계와 시점을 정교화할 수 있어서 자신의 의지를 쉽사리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둘 수 있는 강한 영혼으로요. 저는 이 두 영혼 사이의 미묘한 차이들이 작가님 작업 곳곳에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Just After Christmas> 연작 중 평면 작업의 경우 배경의 풍경은 여행지에서 빠르게 스쳐지나갔던 풍경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터전(영토)의 의미가 희석되며 유목적인 상황들, 이방인의 태도가 읽힙니다. 그리고 이후 스튜디오에서 정물들과 함께 재촬영한 장면들에서는 정착, 안정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여행이나 이동 후의 후일담들을 추억삼아 이야기하는 듯 하기도 하구요. 이동과 정착이라는 강한 두 열망이 충돌하는 부분입니다. 비릴리오를 재차 언급하자면, 그는 현대 사회가 가속화와 공간의 축소화로 인해 ‘극의 관성’에 도달한 상태라 표현합니다. ‘극의 관성’은 속도가 극한에 다다른 임계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임계점은 떠나기도 전에 도착해 있는 상황, 이동하는 과정이 의미를 잃어버린 상황으로 저는 해석하고는 합니다. 따라서 저는 작가님의 작업을 임계점 직전의 과도기적 상태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혹은 시대적으로 이 세계가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지만 다시 과도기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의 작업에서 물리적 이동, 관념적 이동들이 미치는 영향들에 대해 자세히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 : 제 안에는 유목과 정착에 대한 상반된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아요. 그것이 말씀하신 이분화된 영혼과 닿는 지점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어떤 사회에 완전히 정착한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조금은 거리를 두고 지내는 이방인만이 느끼는 생경한 정서를 좋아하고 그럴 때 나에 대한 생각이나 작업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긴 해요. 근데, 생각해보면 결정적으로 또 다른 곳으로의 이동을 결심했던 순간은 더 나은 곳에서의 정착을 꿈꾸고 있을 때거든요. 어떤 곳을 떠나는 이유가 이젠 그 곳이 지겹거나 자유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그 곳이 나의 최종 정착지일 수 없음이 인지될 때, 그 곳에서의 내 경험과 시간을 통해 다음 목적지로 진입할 근거를 나름대로 충분히 마련했기 때문이라고 해야할까요. 달리 말하면 어떤 곳에 대한 인식의 파편들을 재료삼아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한 형태가 작업이라면, 이미 작업이 나온 이후에는 그 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어지는거죠. 이제 나는 그곳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더 내게 맞을 것 같은 곳으로 진입할 힘을 얻게 되는 거라고 할까요.
오 : 매번 새로운 상황에 대한 태세 전환과 대응이 매우 중요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질 들뢰즈의 유목적 사고와 백남준의 유목적 상상력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들뢰즈는 ‘제자리에서의 여행’이라는 재미난 개념을 가져옵니다. 하지만 기다리는 방법, 무한한 인내력을 통한 제자리 여행이라는 점에서 의도한 지점으로의 이동을 의미한 비릴리오의 ‘임계점’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의도된 사유가 아닌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맞이하거나 받아들여야 하는 사유 체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예측불허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며 의도보다는 우연에 대한 임기응변이 중요할 때도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작가님의 야외촬영과정에서 어떠한 기다림이 있는지, 어떠한 저항이 있는지 알 수 있다면 작업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 야외 촬영과정에서 기다림이나 저항이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발견된 풍경과 저의 즉각적인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것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면 그 파편을 작업을 위해 애써 수집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음 번에 맞게 될 더 좋은 순간과 파편들이 늘 그랬듯이 있을 것이고, 개별 파편들이 전체 그림을 완성하는 데 꼭 필요한 퍼즐 조각의 형태로서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오 : 백남준의 어록을 모아둔 <백남준 :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를 보면 백남준의 유목적 사고체계와 상상력을 깊이 실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달리는 말 위에서 한 점의 풍경들을 바라보고 사유하고 이내 다른 풍경을 맞이하며 또 사유하고 상상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반복하는 인상입니다. 유목적 상상력은 중심 구획 없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때론 쉽게 휘발되는 것들이라는 인상입니다. 저는 작가님의 작업 과정에서 이러한 상상력들이 오브제와 설치를 이용한 후반 촬영에서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비직선적인 피드백 시스템이며 이를 탈중심화라는 단어로도 요약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업대 위에 올려진 풍경사진은 과거의 흐름은 닫히고 새로운 구조물들과 오브제들과 결합하여 새로운 풍경, 현재의 흐름을, 다시 한 번 사진의 셔터를 누르며 미래의 2차원적 풍경, 흐름을 예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단순한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현장에서 사진기를 들고 맞이하였던 인상들, 상상력들이 스튜디오에서 다시 각색될 때 어떤 모습으로 변주되어 가는지 그 미세한 부분들이 궁금합니다.
이 : 백남준의 사고 체계는 첫번째 촬영 과정에 닿아있는 느낌이에요.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면 앞서 언급하신 질 들뢰즈의 제자리 여행 개념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고요. 사유를 촉발하는 미약하고 개별적인 단서로서 파편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그것들을 살펴보는 과정을 거치게 되죠. 그러면서 파편들을 스튜디오의 작업대에 올릴 것인지, 말 것인지, 스튜디오의 작업대에 올리기로 한다면 어떤 것이 오를 수 있고 어떤 것은 그럴 수 없는 것인지를 생각하고요. 이후 선별된 이미지들의 결을 묶어주는 작업을 스튜디오에서 진행해요. 물론 이미지 하나하나가 스튜디오에서 개별성을 더 강화하기는 하지만, 그럼으로 인해서 전체적인 방향성을 띠게 되는 거죠.
오 : 스튜디오에서의 촬영이 선형의 이야기를 점과 점으로 압축 연결하는 주름의 개념으로도 바라볼 수 있을까요?
이 : 스튜디오 촬영 이전의 파편들이 선형의 구조로 이어져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만 개별적이고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점들을 또다른 점인 사물이나 확장된 사물과 관계 맺게 한다는 점에서 주름의 개념이 적용된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 : 사진 위에 올려두는 사물들은 사진과 어떤 연계점을 가지고 있는지 꼭 여쭤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그 사물들이 최종 결과물에서 감각적인 형태로 작용하는 것인지 혹은 개념적인 서사로 작용하는지도요.
이 : <일상과 환상>, <따뜻하고 푸른 물결> 시리즈에서 사물들은 이미지와 형태적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들로 선별, 촬영되었습니다. 특히 그 사물이 먼저 촬영된 사물들의 실제 크기와 대조적으로 작용하여, 평면인 사진 위에 올라간 것임이 도드라지는 연출을 시도하려고 했죠. 구체적으로 들어가자면 <일상과 환상> 시리즈에서는 익명성, 보편성을 띠는 사물들을 사용한 반면에, <따뜻하고 푸른 물결>시리즈에서는 좀 더 장소특정적인 사물이 쓰였죠. 촬영된 사진에 대한 저의 인식과 특성에 따라서 사물 역시 그런 특성을 따랐던 것 같아요. 근데 <Just after Christmas>시리즈에서는 좀 더 사물의 연출적 성격이 가미됐어요. 여전히 사진과 관계 맺을 핵심 사물을 결정하는 기준은 사진과 사물의 형태적 연관성, 안팎의 경계 흐림이긴 하지만, 놓여지는 사물에 ‘파티가 끝난 뒤의 정적인 정서’라는 성격을 부여한거죠. 또 이전 작업보다 선형성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런 부분들이 강화되면서 시간의 흐름도 사물에 반영되기도 했고요. 그래서 이전에는 핵심사물 한 두개만 사진 속 이미지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면 <Just after Christmas>에서는 분위기 연출을 위한 다른 사물들이 등장함으로써 해석이나 관점의 폭도 좀 더 다양해지기를 의도했어요.
오 : 작가님 사진의 경우 시작점인 사진 위에 오브제 연출 이후, 총 두 가지의 특이점들에 도달한 모습들이 보입니다. 첫 번째는 사진이 다시 입체, 설치의 형태로 인화물이 다시 오브제로 해석되는 부분입니다. 아마 일상과 환상 시리즈에서 강남아파트 때부터 시작된 방법론이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 특이점은 <Just after Christmas>연작에서 January 02와 February 같은 작업들에서 발견됩니다. 인화물들이 사진 속에서 다시 정물처럼 작용하고 있습니다. 기존 작업에서 사진 인화물들이 오브제의 배경지 역할을 담당하며 평면적인 시선으로 그 경계가 매우 불분명해 보였던 작업들과는 매우 다른 어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시도와 변주의 이유들이 궁금합니다.
이 : 맞아요. <Just after Christmas> 시리즈에서는 이전과 다르게 사진이 더 직접적인 사물로 화면 안에 등장해요. 그것도 시간에 의해 마모되어가는 연약한 종이 몸을 가진 사물로서요. 그렇지만 이전부터 사용해왔던 사진 안쪽 이미지와 사진 바깥의 사물이 맺는 관계를 여전히 생각하면서 사진과 사물을 배치했기 때문에 사진 안과 밖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부분도 존재하고, 또 사진이 정물로 등장함으로써 그 경계가 확연해지는 부분도 동시에 가지고 있죠. 이 두 개가 완전히 다른 어법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진을 사물로 보는 저의 태도가 강화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아요.
오 : 매체를 실험한다는 점에서 즉물적이고 메타적인 해석이 다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풀어보자면 사진 자체가 갖는 기술적 특성에 대한 저항으로도, 혹은 어린아이가 사진을 평면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기술(포토샵과 같은)이 없어 그 위에 즉물적인 오브제를 붙여 나가며 사진을 조작하는 방식으로도 보입니다. 원본을 즉물적으로 복제한다는 점에서는 프로타주(탁본)의 의미도 가지고 있으면서 재생산된 이미지들을 설치작업에 대입한다는 점에서는 꼴라주의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이런 능력은 포착하고 현상하여 인화한다는 사진매체의 범주를 넘어서는 행위로 보입니다. 이러한 매체를 위한, 의한 실험들의 토대와 의도가 궁금합니다. 또 궁극적으로 그 의도들의 지향점이 있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이 : 저는 사진매체의 독특한 성격이 흥미로워 사진을 매체로 선택했는데요. 다른 예술매체와는 달리 빈틈없고 정확한 기계의 속성과, 그것을 다루는 불확실하며 주관적인 인간의 속성이 공존하는 사진의 매체적 특성이 늘 양가적인 태도 사이에서 고민하는, 혹은 상반된 입장의 경계선에 서 있는 것 같은 제 모습과 닮은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서 끌리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경계에 대한 특별한 인식 때문에 그걸 흐리거나 강화하는 두 가지 모습을 후반 작업을 통해 더 강조하는 것 같고요. 특히 기계가 가지는 재현의 정확성이나 객관성이 생각보다 우리의 눈을 가리는 측면이 많아서, 그 반대쪽 특성, 즉 인간의 주관에 의해 제어되는, 연약하고 쉽게 변질되는 속성들이 쉽게 간과될 수 있다는 점이 저는 늘 마음에 걸렸어요.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대단하지 않은 풍경과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할 것 같은데요. 사진 바깥쪽의 평면성과 안쪽의 입체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과 세상에서 맺는 관계들도 역시 표면 밑에 다양한 층들이 존재하고, 그 표면은 오히려 내부보다 취약한 것이어서 언제든지 찢기거나 변형될 수 있음을 매체실험이나 형식변주를 통해 암시하고 싶었어요. 이런 생각이 미적 사고로 환유되었을 때 제가 작업으로 가져올 수 있는 사진의 문제적 지점은 시공간을 포함한 차원이나 크기 가변성, 시각적 재현 능력과 여타 감각적 재현 능력 사이의 괴리라고 생각했어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변형된 콜라주의 방식ㅡ차원을 교차시키거나 크기를 대조하는 등의ㅡ을 작업의 방법론으로 들여오고 그 변주적 실험을 지속해온 거죠. 만약 시리즈별로 내세운 각각의 주제들만을 말하고자 했다면 어떤 면에선 포토샵을 사용하는 것이 보다 완벽하고 효과적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모든 시리즈를 통괄하는 대주제는 사실 이러한 사진성을 부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진과 사물의 실제 배치에서 오는 충돌들을 의도적으로 화면 안에 담아내려 했어요.
오 : 사진으로 귀결되는 다각도의 접근과 해석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접근에 작가님의 삶과 경험이 녹아 함께하고 있어 더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방금 저는 작가님 사진에 대해 메타적 해석을 통한 접근을 시도하였습니다만 혹시 제도비평적 관점에서 작가님 작업을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있을까요? 형식이나 마감에 있어 매끄러움, 깔끔함과 구분되는 작가님의 사진에 대한 태도는 어딘가 특별해 보입니다.
이 : 사진을 다루는 사람들은 보통 매끄러운 감각, 정수의 아름다움 같은 것들을 지향하는 측면이 강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사진(가)적 감수성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런 게 저랑 딱 들어맞지는 않는 것 같아요. 또 사진을 매체로 선택한 이유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사진의 속성이 와닿아서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이런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고 제가 감각적으로, 본능적으로 좀 더 좋아하는 것은 평면조형보다 입체조형에 가까운 것 같아요. 특히나 입체조형 중에서도 불순물이 많은 상태라던가, 매끄럽지 못하고 우둘투둘한 질감이나 상태들을 좋아하다보니까 단순한 현장촬영만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는 사진가의 미니멀한 말하기 방식만으로는 충분한 완결감 같은 것을 잘 못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후반작업으로 일부 해소하는 측면도 있어요.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그런 매끄러움, 정수의 아름다움 뒤에 있는 속성들은 일관적이게도 제가 들춰내고자 하는 사진 뒤쪽의 하얀 면, 도시의 폐허적 풍경 등과도 결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오 : 동시대 상황에서 이지안 작가님 작업들이 갖는 의미에 대해 다양한 생각들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매체적, 개인사적으로 다양한 의의들이 내포될 수 있는 가능성들이 보입니다. 초반에 속도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만, 이번에도 작가님이 느꼈을 ‘상대적 속도’에 대한 의견들을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타국과 고국 사이에서 변화되는 삶의 리듬감을 포착하였던 부분들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주와 이주 사이에 리듬감이 왜 변화되었는지, 더 나아가 작업에는 삶의 리듬감이 어떻게 내재되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저는 Just After Christmas 2채널 방식으로 상영하였던 영상에서 그 단초들을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마스 이전, 한국을 떠나기 전 느꼈을 중압감, 피로들과 북유럽에 도착한 후 직감한 당혹스러웠을 고요함, 정적들이 묘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 한국과 노르웨이 사이에서 느낀 너무 다른 삶의 속도 ㅡ그것이 사람에 의한 것이든 환경에 의한 것이든ㅡ를 사진화된 사물과 계절마다 변하는 화면 연출을 통해 계획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평면 작업이었다면 Just After Christmas 비디오에서는 확실히 좀 더 복합적이고 직설적인 감정의 나열이 복잡한 그대로 드러났던 것 같아요. 우리가 가진 기억이라는 게 아주 연속적이고 평평하게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 의해서 이상한 순서로 맞붙고, 사실과 상관없는 서사 구조로 귀결되어 버리곤 하잖아요. 특히 사진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면서 기억은 소유한 이미지를 위주로 돌아가게 되는 측면이 있는데, 그것이 만들어내는 서사라는 게 정말 비논리적이고 비선형적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그 기억이 만들어낸 서사가 일말의 진실보다 더 강력한 진실처럼 믿어지는 경우가 허다한 것 같아요. 영화를 구성하는 영상과 텍스트도 서로 다른 맞붙음으로 진행되면서 어느 쪽에서도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이 쪽에서도 그럴듯하게, 저 쪽에서도 그럴듯하게 이어지면서 결국에는 같은 장면, 다른 텍스트의 결말로 끝나는데요. 저에게는 재밌게도 두 결론이 비슷한 크기로 제가 느꼈던 고요와 적막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평평하고 선형적인 서사의 흐름보다 오히려 더 진실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오 : 제가 혹시 이 작업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까요? 작업의 궁극적 의도에 대해 좀 더 들어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이 : Just after Christmas 필름은 또 사진성에 대한 다른 시도도 들어간 작업이에요. 비디오나 디지털 사진은 전통사진의 연장선 위에 있기는 하지만, 그 원형인 비물질 데이터가 하나의 몸에 안착하는 형태로써 굳이 물질로 전환될 필요가 더 이상 없다는 점에서는 다른 지점이 생겨난 것 같아요. 크기와 형태의 변형이 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졌고, 또 빛으로 공간과 사물을 점유하다가 어느 새 흔적없이 사라져버릴 수 있게 되기도 했죠. 이 즈음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서 특히 비물질적으로 존재하지만 나의 인식과 현실을 점령하는 것들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었는데, 이런 비물질 오브제들간의 맞닿음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디지털 사진 매체가 시공간을 파편화해 비물질 조각으로 갖고 있듯이 생각이나 기억, 소리, 불분명한 몸짓들 같은 다른 비물질 오브제들도 그 맥락을 끊고 파편화해 재료로 사용한다면 그들 사이에 비물질적인 주름을 생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거죠.
오 : 제가 작가님 작업을 좀 향수어리게 바라봤던 것 같아요. 저는 작가님의 작업이 사회적 피로, 개인적 피로와도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을숙도에서는 바다 노동에 지친 고단한 흔적들이, 강남아파트에서는 누군가가 치열하게 생존을 했을 풍경들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영주, 문래, 영등포 일대의 구조물들 역시 익명의 생존을 위해 부단히 분투하였던 사물들이 주인공으로 비춰집니다. 어쩌면 작가님이 현장에서 마주하였을 이 누적된 피로들이 작가님의 후반 스튜디오 작업들을 통해 위로받고 있는 인상도 들고요. 어쩌면 북유럽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의 작가님이 느꼈을 빠른 리듬감은 한국이라는 사회적, 개인사적 피로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 : 어떤 부분에서는 피로라는 감정과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노르웨이에 가기 전, 한국의 속도가 그리 버겁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어요. 그냥 당연한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힘들었던 시기는 준비가 안 된 채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저한텐 너무 느렸던 노르웨이의 리듬감과 그 리듬감에 적응하자마자 다시 태도의 전환을 강요받는 것 같았던 한국적 리듬감의 격차를 인지할 수 있었던 2019년 전반의 시간들이었거든요. 단지 어떤 시간대가 너무 느렸거나 빨랐기 때문이 아니라, 저의 중심점을 그 어디엔가 맞추고 적응하려 노력했던 그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피로와 스트레스가 저를 짓눌렀던 것 같아요. 그 힘들었던 기간 동안 작업을 했으니, 그런 것들이 보이는 건 확실히 그런 면을 드러내고 있는 거겠죠.
오 : 첨언하자면, 현대사회는 미셸 푸코가 얘기한 형벌적 체계가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변해왔습니다. 성과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개인들은 결국 더 큰 성과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매질하며 달려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속도와 시간의 이기가 개입될 수 밖에 없습니다. 수 많은 성공신화들은 누가 스스로를 얼마나 더 빨리, 더 많이 착취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되고는 합니다. 남들보다 덜 자고, 덜 먹고, 더 많이 일하는 모습들은 이제 남일 같아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경쟁속도에 대한 대칭점에서 저는 현재의 브이로그로 대두되는 일상성이 강조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의 느린 기록들, 어쩌면 큰 의미가 없을 이야기들, 누군가에게 관심이 되지 않을 만한 부분들, 먹고 사는 것과는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내용들이 어느 순간 폭발하듯 터져 나오고 있는 인상입니다. 저는 그런 부분에서 작가님의 작업이 그 일상성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미 없는, 대단하지 않은 풍경들이 작업의 전면으로 나오고, 마치 시간 역순으로 복기하듯 스튜디오 촬영 이미지가 과거를 반추하며 나아갑니다. 그렇게 저는 작가님의 심심하지만 위안되는 풍경 속으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2020)